곰곰이 되짚어보면, 지지난 달 한 번 떨어뜨린게 무리가 갔던 것일 수도 있다.

아무튼.

예기치 않게 갑자기 필통에서 빠져나올 때 부드럽게 받아주는 내 손을 박차고 튀어나간 비스콘티 반 고흐 붉은 포도밭은 아직 낯설기만 한 새 교실 바닥으로 추락했고, 떨어짐과 동시에 촤아악 교실 끝으로 튕겨나가는 조각을 보며 나의 멘탈도 같이 튕겨나갔다.

그러니까 이렇게 된 사건인게다.

부랴부랴 케이스와 보증서를 확인하고, 구매처였던 펜샵으로 데리고 갔다.

나의 희망줄이었던 펜샵에서는 회생 불가 판정을 내렸다. 

어투로 보아 정도에 따른 진단이라기 보다, 이런 경우에는 일괄적으로 배럴 교체 처분을 내리는 듯했다.

그 점도 이미 각오하고 있었으나, 금액을 듣는 순간 다시 한번 아득했다.

구매가의 50% 가깝지 않은가.... 

그래... 사실 이 녀석들은 배럴이 다 팔아먹고 있는거라 이해 못할바는 아니었다.

그래도... 그래도... 선뜻 주세요! 하게 되지는 않는 게 인간의 마음이었다.

게다가 나는 최근 실직하지 않았던가....!!!

 

'어짜피 새로 사야할 거라면, 그래 본드질이나 해보자.'

마음먹고 호기롭게 잉크만 한아름 사서 돌아왔다. (.... 실직한 건 어디의 누구!!!???)

 

만년필 카페의 여러 고수분들의 끊임없는 조언 덕에, 오공본드나 순간 접착제, 목공본드 세 가지가 본드의 다인 줄 알았던 편협함을 깨고 에폭시 본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. 정말 위험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. 저 세가지 다 배럴을 아주 못쓰게 만들 가능성이 있었으니까...

 

그렇게 아작난 영혼을 조각조각 모아붙이며 버틴 이틀.

에폭시 본드가 도착했다.

그간 카페에서 들은 조언과 네이버 블로그들을 토대로 본드를 치덕치덕 발라준 후 접착 도전.

붙이자마자 새어나오는 본드는, 역시 조언을 토대로 한 간접 경험을 바탕으로 재빠르게 판단하여 물티슈로 닦아주었다.

 

깔끔하게 붙어가는 배럴을 물티슈로 닦고 또 닦고 하며 기분 좋은 서광이 비치나 안도하던 찰나.

과유불급이라 했던가.

잘못 힘을 줘서 붙여놓은 조각이 삐그덕 어긋나며 배럴에 에폭시 자국을 남겼다.

새어나오는 욕과 비명을 억누르며 부랴부랴 조각을 원 자리로 복원하고 물티슈로 마구마구 닦았다.

이미 경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에폭시 폰드가 배럴에 꾸덕하게 남을까, 미친년처럼 닦고 또 닦고.

아마 15초쯤 되었을, 나로서는 15시간 같았던 그동안 물티슈 몇장을 꺼내 쓴건지...

 

 

그 덕인지 다행히 배럴에 에폭시는 거의 걷어낼 수 있었다. 

접착면 주변으로 광택이 살짝 죽어버리긴 했으나 적어도 손으로 쓸었을 때 걸리는 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기로 했다.

 

전체적 결과로 놓고 보자면, 배럴이 워낙 현란하여 다행히 슥 봐서는 접착면이 눈에 띄지 않는다.

그러나 불빛에 비춰보거나 손으로 쓸어보면 어쩔 수 없이 크랙이 까슬하게 걸린다.

실금처럼 크랙이 있다. 손으로 쓸어보면 까슬하게 걸린다.

 

꽁지부분이라 펜을 사용할 때 거슬리거나 하지는 않는 위치이다.

단단하게 잘만 굳어준다면 실사용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나 그보다는 나의 멘탈이 계속 저 크랙에 달라붙어 있을까 그게 문제이다.

 

강한 충격에는 다시 떨어져 나갈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, 그땐 뭐 깨끗이 포기하고 비싼 배럴을 들일 밖에 ....

그래.... 닙 안날아간 게 어디냐...